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코바야카와 타카카게 (문단 편집) === [[임진왜란]] 참전 및 말년 === [[임진왜란]]에 6군 사령관으로 참가, 전쟁 초반부에 [[전라도]][* 당시에는 전라도 였으나 [[박정희]] 정권 기, 국무총리였던 [[김종필]]에 의해 [[충청남도]]에 편입되었다.] [[금산군]] 일대를 빠르게 점령하고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전라도]] 지역의 공격을 맡았다. [[고경명]]을 필두로 한 조선 의병장들과 붙었던 두차례에 걸친 [[금산 전투]]는 큰 피해 없이 막아냈으나 거기서 시간을 끄는 바람에, 더 빨리 진행해야 했던 [[이치 전투]]에서 시작이 늦어져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권율]]과 [[황진]]에게 막혀 전주 공략에 실패한다. 다시 금산으로 물러났다 북에서 밀고오는 명군의 압박을 받던 와중에 [[1592년]] [[8월 16일]], [[우척현 전투]][* http://ko.wikipedia.org/wiki/%EC%9A%B0%EC%B2%99%ED%98%84_%EC%A0%84%ED%88%AC]에서 [[거창군]]을 통하여 진입하려는 시도가 김면과 정인홍에게 저지되자 전라도 진입을 포기하게 된다. 이후 명군의 물량에 밀린 고니시가 평양성에서 물러나자 일본군 수뇌부에서는 퇴각 의견이 주된 의견였으나 고바야카와는 '''"여기서 그냥 물러난다면 아군의 사기도 떨어지고 적군의 기세도 올라서 오히려 큰 피해를 입을 것."'''을 주장하며 명군과의 일전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나온 전투가 바로 [[벽제관 전투]].[* 실제로 [[벽제관 전투]]에서 패전 이후 명군의 군사 행동은 크게 위축되었고 외교적인 협상으로 정책이 바뀌었다.] [[1593년]] [[2월 27일]], [[벽제관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명나라]] 군에게 명성이 퍼졌다. 여담이지만 벽제관에서 명군이 후퇴하자, 서울 탈환을 위해 북상, 행주 산성에 주둔한 권율의 3천 전라도 병력은 갑자기 쭈구리 신세가 되었으며 승리로 승기가 오른 일본군은 이참에 함께 쓸어버리기 위해 공세를 계획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행주 대첩]]. [[1593년]] [[3월 14일]] (음력 2월 12일), [[행주 대첩]] 때에도 참전해서 그의 부대가 목책을 뚫고 들어오는 등 제법 선전했으나 조선군의 분전으로 결국 패퇴했다. 이후 [[낙동강]]의 수운을 장악, 통제하기 위해 지금의 [[부산광역시]] [[구포]] 지역에 [[왜성(건축)|왜성]]을 쌓았고 이는 지금도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우세한 군세를 바탕으로 꾸준히 조선군과 명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금산에서는 강을 방어선 삼아 우주 방어를 준비하던 조선군을 야습으로 격퇴했고, 1차 [[금산 전투]]에서는 압도적인 물량 차이를 바탕으로 출성 공격을 감행해 [[고경명]]의 조선군을 패배시켰다. 2차에서는 [[조헌]]의 의병이 후속 부대가 없고 수가 많지 않은 것을 노려 야간에 출성해 포위망을 짜고 승리. [[권율]]과는 2번 싸웠는데, [[이치 전투]], [[행주 대첩]] 2번 다 권율에게 패했으며, 본인은 정유재란이 일어나고 전쟁이 끝나는 1598년의 1년전인 1597년에 사망했다. 통설에는 말년에 [[도요토미 히데요리]] 탄생 이후 히데요시가 처조카이자 양자였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로 하여금 모리 가를 잇게 하려 하자[* 당주 [[모리 데루모토]]에게 당시 아들이 없었다.], 주가를 지키기 위해 조카 모리 히데모토를[* [[모리 모토나리]]의 4남인 호이다 모토키요의 아들이다. 호이다는 모토나리가 50 이후 측실에게서 얻은 아들로서 정실 소생의 아들들과는 나이 차이가 꽤 많이 난다. (20년 정도) ] 데루모토의 양자로 들이고 히데아키는 자신의 양자로 맞이했으며, 이 과정에서 원래 자기의 양자인 막내 동생 히데카네를[* [[모리 모토나리]]의 막내 아들로서 그의 나이 칠순이 넘어 본 늦둥이 of 늦둥이. 태어났을 때 큰형 타카모토는 이미 사망한 상태.] 파양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모리 히데모토를 테루모토로 하는 것을 히데요시가 공인한 것은 그 이전인 1592년의 일이며, 증거가 되는 문서 역시 남아있다. 그렇기에 이 시점에 히데모토를 폐하고 히데토시를 모리의 후계로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히데아키의 입양은 타카카게 본인의 의사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된다.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정치와 지모가 뛰어난 인물로서 전국에 이름을 떨쳤는데, 히데요시는 '서쪽은 타카카게에게, 그리고 동쪽은 이에야스에게 맡겨두면 걱정할 것이 없다'고 했을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또한 히데요시는 '이 일본에서 제대로 된 정치를 할 수 있는 인물은 타카카게와 [[나오에 카네츠구]] 뿐이다.'라고 했으며[* 단, '하지만 타카카게는 용기가 부족하되, 카네츠구는 지혜가 부족하다'라고 덧붙였다.], [[구로다 요시타카]]는 타카카게의 부고를 받고서 '일본의 마지막 현인이 죽었구나'라며 탄식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